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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핑크빛으로 반짝반짝, 유이의 세상=d 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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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환자는 좀 까다로워. 나에게 담당환자를 넘기며 S는 구겨진 웃음도 함께 건넸다. 즐거워서 웃는것은 아님이 분명한 S 특유의 웃음은 늘 날 헷갈리게 한다. 내게서 원하는 반응이 뭐길래 저런 미묘한 웃음을 짓는거란 말인가. 이번에도 늘 그렇듯이 난 S의 숨은 속내를 짐작해내지 못하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S에게 건네받은 환자의 기록을 꼼꼼히 읽었지만 이런 활자는 내게 잘 와닿지 않는다. 시간을 확인한다. 여덟시 오분. 저녁식사는 했겠고 아직 잠잘 시간은 아닐거다. 잠깐 다녀오기로 하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운동삼아 2층을 계단으로 올라 병실의 문을 연다. 알싸한 병원 특유의 죽음과 닿아있는 냄새가 유독 이 병실에서는 짙다. 이 환자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뜻하는 냄새. 의사로서는 해선 안될 생각이다. 내가 맡게 된 담당 환자는 새하얀 얼굴에 예쁘장한 여자애였다. 가슴이 봉긋 솟아오른 소녀라기엔 원숙하고 처녀라기엔 앳된 여자애.

"담당의가 바꼈어요. N입니다. 잘부탁드려요." 

나보다 2,30살은 어릴 테지만 존대로 인사를 청한다. 여자애의 텅 빈 눈동자를 보면 어린애라고 마냥 하대할 수 없는 깊이가 담겨 있다. 여자애는 내 인사에도 의미없는 눈빛을 한번 줬을 뿐 멍청하니 누워있다. 이미 시체와도 같다. 사실 여자애의 병은 죽음을 염려할 병은 아니다. 당뇨가 유전이 되서 다리가 썩어들어가고 있으니, 왼쪽 무릎 아래와 오른쪽 발목 아래를 절단하면 목숨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 하지만 20살도 못된 여자애의 두 다리를 절단하는게 죽음보다 나은가? 여자애의 생각은 아마 아닐 것이다. 나는 묵묵히 여자애의 챠트와 여자애의 얼굴을 번갈아봤다. 상태가 심한 왼쪽 발가락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래도 되느냐고 허락을 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아이도 여자애였다. 낳은지 1년이 안되서 세상을 떴지만 그대로 자랐으면 눈 앞의 여자애만한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바빠서 아이를 낳았을 뿐 건강을 신경쓰지 않았고, 아이 아버지가 어느날 응급 수술이 막 끝난 내게 전화로 아이의 죽음을 알렸을 때에도 다음 수술 준비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렇게 십몇년이 흐르고나서 나는 수술대에 자주 서지 않는 한직으로 물러났고 이제서야 내가 낳은 아이에 대한 기억을 가끔 떠올린다. 실은 떠올릴 기억이랄 것도 별게 없지만. 그리고 이렇게 아이에 대해 생각할때마다 아려오는 가슴 어딘가에서 소름이 끼친다. 위선도 이런 위선이 없지.

"수술은 내일이예요. 수술은 원래 담당의가 하니까 걱정하지 마시구요. 마음 편히 가지세요."

여자애는 대답이 없다.

"보호자분은 어디 계시죠?"
"출장갔어요. 수술동의서는 이미 작성했으니 걱정마세요."

S의 말로는 이 여자애도 편모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 나는 S에게 하듯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 병실을 나왔다. 죽음의 냄새가 내 몸에도 쿰쿰히 베여있다. 
Posted by 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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